2017. 12. 31 – 2018. 1. 31

제주도를 거점으로 작업하고 있는 세 작가는 갤러리2 중선농원에서 진행한 제주문화재단의 <우수기획프로그램>을 통해 개인전을 가졌다.

전시와 비평가, 큐레이터와의 워크숍 등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 한 이번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결과가 아닌 또 하나의 ‘과정’으로서 새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문제는 숫자에 있다. 달력의 맨 마지막 장인 ‘12’월에 접어들면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할 준비를 한다. 우리가 ‘7’월에 접어들면 올해의 반이 지나간 것에 흠칫 놀라는 것처럼 말이다. 12월은 모두에게 지난 한 해를 복기하게 한다. 문제는 또다시 숫자에 있다. 과거를 충분히 돌아보고 성찰할 시간을 갖기는커녕 다시 새해를 맞이하게 된다. ‘시간’은 제 순서에 맞춰 틀림없이 그 자리에 온다. 인간은 과거를 복기하고, 현재에 충실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

갤러리2 중선농원은 김범균, 조기섭, 허문희 세 작가와 과거, 현재를 공유하고 미래를 상상하며 한 해를 보냈다. 여기서 미래는 10년 후, 5년 후가 아니다. 언제나 변화를 염두에 둬야하는, 오히려 변화를 요구하는 현대미술에서 먼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갤러리2 중선농원과 작가들이 상상한 미래는 2017년 12월 31일! 바로 전시 당일이다. 7월부터 9월까지 릴레이로 진행된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김범균, 조기섭, 허문희 세 작가와 이번 단체전을 계획했다. 단체전은 작가마다 한 점의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김범균은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광지 표지판 속 풍경을 회화로 재현한다. 풍경의 한 부분이 뜯겨 나가거나 구겨진 흔적, 거울에 비친 듯이 이질적인 풍경이 중첩되는 것은 그림 속의 이미지가 실재가 아닌 허구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신작 <새천년 비자나무>(2017)는 이전 작품에 비해 거친 붓터치가 두드러진다. 비자나무의 풍경은 실제로 비자림 입구에 설치된 안내표지판 이미지를 차용했다. 멀리서 보면 나무의 형상이 눈에 띄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형상이 아닌 거친 붓터치가 관람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거리 조정에서 오는 이러한 변화는 이미지의 실재와 허구성을 탐구한 작가의 의도가 그림 내부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형식에까지 확장된 것을 의미한다. 8개의 캔버스로 이뤄진 5m 높이의 대형 작업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캔버스가 연결되는 부분에서 보이는 미묘한 색상의 차이, 이미지의 엇갈림을 보여준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자연의 실재성과 이미지의 허구성 사이의 차이가 캔버스의 경계에 안착되어 있다.

제주도의 자연을 담은 조기섭의 그림은 실재의 자연이라기보다는 심상의 풍경과 닮았다. 그의 마음속에 콕 박힌 제주도의 풍경들이 재구성된 화면은 강렬한 색채 대비와 은분을 통해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색채는 조기섭의 정서를 표현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이번 전시에서 그는 과감하게 색을 절제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하얀 평면 위에 이리저리 형태를 그리고 색을 입혀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그리기보다는 지워내기를, 색을 입히기보다는 탈각시키는 작업을 반복하여 <흐놀다>(2017)를 완성했다.

그는 이번 작품을 제작하면서 대상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소거할 것인가 고민했다고 한다. 호분(흰색)과 은분만으로 표현된 그림은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붓질이 표면 위에서 흐놀 듯이 유영하며, 형상은 돌출과 퇴보를 반복한다. 그림의 표면을 갈아내는 샌딩 작업은 모든 것을 ‘없음’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예민하게 갈아낸 흔적 아래로 이전에 그렸던 형상이 남아 있다. 그림과 나의 거리, 빛의 방향과 세기에 따라 그림의 얼굴은 계속해서 변해간다. 관람자의 망막은 화면으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거대한 크기와 세밀한 붓질, 은분의 재료적 특성은 강렬한 색채보다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바로 여기에 신비가 있다.

허문희의 작품에는 인형, 오르골, 장난감 집과 같은 상징이 삽입되어 있다. 하나의 무대처럼 구성된 화면은 그들이 주인공이었다. 연극 무대와 같은 그의 그림은 관람자들에게 이야기를 만들어 내게 하면서 강한 상징성을 드러낸다. 허문희 작품의 구상성은 사실 형상 자체가 아닌 형상이 배치된 형식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이번 신작 <오랜된 숲>(2017)에서 그 주인공들이 무대 뒤로 숨어 버렸다. 여전히 많은 질문을 던지는 그림이지만, 이전과 다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제 관람자는 상징적으로 배치되었던 대상이 아니라 공간 자체를 바라보게 된다.

곶자왈 자체가 지닌 환상적인 모습과 희귀한 식물,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동물의 형상은 왜 저들이 저 숲 안에 숨어 있는지 묻게 한다. 숲 안으로 숨어 들어가 빼꼼히 얼굴을 내민 생명체들은 사실 멸종 위기에 있거나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는 동물들이다. 인적이 드문 숲은 인간에겐 미지의 세계이며 동물에겐 생존을 위한 공간이다.

허문희가 마음을 쏟고 의미를 부여하는 대상은 무대 위의 주인공이 아닌, 그들이 존재하는 공간 자체인 것이다. 질문은 ‘저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가 아니라 ‘왜 그곳에 존재하는가?’로 변경돼야 한다.

다시 숫자의 문제로 돌아와서. 이번 전시를 준비하여 갤러리2 중선농원은 작가들에게 ‘한’ 점의 신작을 요구했다. 6개월 동안 한 점의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만약 비평가와 큐레이터에게 지금까지의 작품을 직접 보여주고, 개인전을 계획하고,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며 전시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이것은 물리적으로 시간을 소모했다는 말이 아니다. 타자에게 자신의 작업 방향을 그림이 아닌 언어로 설명하고,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를 통해 새 작업을 계획하는 몸과 정신의 기울임을 말하는 것이다.

딱 한 점의 작품으로 변화를 오롯이 드러내야 한다는 그 마음의 부담감을 상상해본다. 그러나 그 딱 한 점의 작품으로 전시는 충만하다. 작품에서 보인 변화가 지속될지 아니면 또 다른 지점으로 나아갈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시작점 혹은 전환점은 하나의 점이면 된다.

한편, <김범균 조기섭 허문희>개인전은 2017. 12. 31 – 2018. 1. 31까지 갤러리2 중선농원(제주 제주시 영평길269) 이어지며 관람시간: 10:00 - 17:00 (화-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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