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오피니언 [양일화 칼럼] 4.3! 그 歷史의 소용돌이 속에서
[양일화 칼럼](33)귀향
고성한 기자 jejuin@jejuinnews.co.kr | 승인 2017.09.15 21:35
▲ 필자 ⓒ제주인뉴스

그날 밤 목포여관에서 밤을 지내고 아침밥을 먹고 부둣가로 뛰어가서 제주도로 오는 배를 탔다. 아! 이것이 고향을 떠나서 몇 년 만이던가?

오전 10시경 제주에 도착하여 제주경찰서로 찾아가서 신고를 하니 신분증을 보고서 질문을 한다.

모든 질문에 나는 사실대로 대답을 하였다. 한림지서로 연락하여 보니 양공옥이라는 이름이 호적에 없다는 것이었는데 “호적상 이름은 양일화로 되어있습니다” 라고 답변하니 그러면 한림지서로 가서 조사를 받으라고 한다. 나는 경찰서문을 나와서 동문통 큰아버지 집에 가보고 싶었지만 바로 한림지서로 가야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제주 차부(버스 터미널)에 와서 한림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서 한림지서에 도착하여 신분증을 보이고 조사를 받았다.

지서주임이 말하기를 특무대로 가보라고 한다. 바로 지서 앞에 특무대사무실로 가서 조사를 받았다. 특무대장은 지금의 이영선씨였는데 그가 조사를 한다. 조사를 마치고 빨리 집으로 가보라고해서 고림동을 향해 걸어갔다. 한림지서에 양상수가 급사로 다닐 때니까 나를 만나서 서로 손을 잡고 고향소식을 전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상수는 지서근무 때문에 같이 올라 갈수가 없고 나 혼자 걸어서 금악으로 올라가다 보니 명월동네에 도착하니 마을친구인 김갑관(故人)씨가 고림동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반갑기 짝이 없다. 서로 손을 잡고 안부를 전하고 헤어졌다. 고림동 거리에 오고 보니 동네 분들이 마중 나와 손을 흔들어준다.

직접 지서에 가서 지서주임에게 신고하여 신상 조사서를 끝내고 나서 나는 뛸 뜻이 기뿐 마음으로 빠른 걸음을 걸어 고향에 도착하여 부모님과 동생이 사는 함바 집으로 갔다.

나는 우선 부모님께 인사부터 드리고 나서 아버지를 쳐다보니 사족이 마비되어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되어있었다. 아홉 살 된 어린동생은 불구자가 되어 거동을 못하고 누워있었는데,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5년여 만에 보는 동생은 나를 보면서 “형님, 어디 갔다 왔수가?”하고 울먹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 말문이 막히고 숨이 턱턱 막힌다.

여기저기 살펴보니 마을 어른이며 친구들 그리고 아이 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나를 맞이하여 반겨준다. 마을어른들도 많이 모여 있었다. 내가 마을 분들께 인사를 하는데 ‘너는 살아서 돌아오니 명이 참 길 구나.’그리고 또 ‘산천이 좋아서 살아 돌아왔다’라고도 한다. 또 어떤 분은 ‘부처님을 잘 믿으니까 살아 돌아 왔다’라면서 모든 동네 분들이 다 같이 환영을 하여준다.

그 순간 고행문형의 어머니가 어디서 나의 소식을 들었는지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나를 붙들고 대성통곡을 한다. “우리 아들은 어디 두고 너 혼자 왔느냐?”며 땅을 치며 울부짖는다. “어머니, 제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라며 사실이야기를 하였다. 형무소생활을 하던 중 전쟁이 발발되어 인민군들이 와서 형무소문을 열고부터 둘이 만나게 되어 이제부터는 헤어지지 말자고 손을 꼭 붙들고 ‘서울로 가면 제주도로 갈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는 포탄이 떨어지는 사이사이로 서울 시내를 지나 개성까지 올라가게 되었고, 거기서 인민군훈련을 받고서 형은 충청남도로 배치 받고 나는 전라남도 광양으로 배치 받아 내려가라는 명령을 받고 내려오게 된 과정을 말씀드렸다. 그리고 그 도중에 조치원에 도착하니 밤이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바람에 논두렁에 한참 엎드렸다가 일어나 보니 아무도 보이는 사람이 없고 더욱이 그때가 깜깜한 밤이라 하는 수 없이 혼자서 길을 찾아보니 살아있는 일행이 많이 있었지만 행문이 형은 보이지 않아 찾을 길이 없었다는 말씀을 하였다.

이때부터 서로가 찾을 길이 없어 나 혼자 오게 되었으며 부산, 거제도, 영천 포로수용소에 다니면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음을 말씀드렸으나 곧이듣지를 않는다. 고행문형의 모친은 울음을 터트리며 대성통곡을 한다.

그 이후 행문의 형 모친은 행문이형의 생일날에 제사를 지낸다.

나 또한 부모님은 아들의 생사(生死)를 알수가 없었기에 죽은 줄 알고 2년 동안 생일날에 제사를 지냈다고 이때 예기를 들었다.

포로생활을 하고 석방되어 고향에 와보니 친척 한사람과 고씨성을 가진 사람이 경찰에 잡혀갔음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은 산(山)사람으로 인정이 안되서 안심하고 살고 있는 중에 6.25사변이 발발했기 때문에 이 사람을 동네에 놓아두면 산(山)사람으로 변하여 제2 반란군이 될까봐 경찰은 죄 없는 사람을 잡아가 버려 지금까지도 소식이 없으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행방불명이 되니 생일날에 제사만 지내고 있는 실정이다.

고림동에 오고 보니 그때까지도 공비가 가끔 있어 이들이 완전 진압이 안된 때라, 동네사람이 농사지으러 다니다가 산(山)사람에게 붙들려 갈수도 있다고 하는데 안심하여 살수가 없었다.

마을청년들은 특공대를 조직하고 매일같이 성담을 돌면서 순찰을 한다. 성담주위에는 군데군데 초소막이 있고 초소막에는 노인과 처녀들이 하루 밤씩 돌아가면서 순번제로 보초를 선다.

낮에는 산에서 공비가 내려 올까봐 높은 산에서 보초를 서는데 어느 틈엔가 공비들이 정문 앞까지 내려와서 보초병에게 사격을 가하여 산속으로 도주하기도 하였다.

보초를 잘못서다가 지서주임에게 발각되면 죽도록 매를 맞는다. 지서 주임은 이북출신으로 김석영이고 꽤나 날카로운 순경이다.

하루는 특공대를 다 모이라고 하여 김모씨를 엎드려뻗쳐 하고서는 권총반도로 때리려고 하니, 김모씨는 벌떡 일어나서 그에게 대항하여 메다치고(꼬꾸라뜨리고)는 밖으로 도망갔다.

김주임은 화가 나서 수류탄안전핀을 뽑고 던지려고 하니 우리는 중창 문으로 도망쳐서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나 김주임은 수류탄 안전핀을 다시 꽂아놓고 “고 순경”하고 부르니, 고 순경은 “예” 하고 김주임 앞에 부동자세로 서자 권총반도로 얼굴을 가격한다. 방위 교육을 잘못 시켰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에 열 받은 고 순경은 화가 나서 우리를 모아놓고 기합을 주려고 촐(꼴)밭 동산에 가서 포복을 시키며 기합을 주는데 어떠한 이유도 없다, 그냥 심심하면 기합을 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기합을 받는다. 다음날 총을 메고 야외로 가서 공비(산 사람)가 올까 봐 보초를 서다가 저녁때가 되면 집으로 와서 보초막순찰을 하곤 하였다.

그 당시 지서주임한테 기합을 안 받고 매를 안 맞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매 한번 기합 한번 안 받았다. 왜냐하면 먹을 것을 갖다 주었으니까. 그 당시는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아버지하고 나는 하늘래기(알맹이가 노란색)뿌리를 파서 진을 빼고 가루를 만들어 고구마 전분과 밀깨 가루를 썩어서 떡을 하여 먹으면서 생계유지를 하였다. 이때 하늘래기 뿌리를 한 됫박 갖다 주니까 컬 컬 컬 웃으면서 자기 마누라 보고 빨리 떡을 만들어서 먹자고 한다. 그 다음 부터는 나를 대하는 얼굴을 보면 날카로운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순한 얼굴로 대하여 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몇 개월 동안을 무사히 지내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김석영 주임을 독한 주임이라고 손가락질 하였는데, 군대 갔다 제대하여 보니 김석영 주임은 자기명대로 살지 못하였다고 한다. 술 먹고 싸움질 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고 하였다. 악종으로 살면 자기 명에 죽지 못한다고 하는데 착한 행동을 하여야만 자기 명에 죽는다는 옛 선인의 말씀이 생각난다. 이렇게 고림동에서 생활하다 군대를 가게 되었다. 그 당시 산 사람에게 잡혀간 사람은 며칠 만에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운이 좋았던 사람은 젊은 나이임에도 잡혀가지 않고 지금까지 우리 마을에 생존해 계신 분도 몇 사람 있다.

나는 집에 왔지만 흉년이 들어서 우리 식구 4명이 살아갈 길이 없어 불구가 된 아버지와 같이 곡괭이를 메고서 매일같이 하늘래기 뿌리를 파고 진을 빼서 누까가루, 밀깨가루, 고구마 전분을 섞어 먹으면서 초근목피(草根木皮) 생계유지를 하였다.

그해 겨울, 병든 동생은 세상을 떠났고 자식은 나 홀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는 6.25 전쟁이 나고 4.3사건 진압이 덜된 때라 산 사람들은 마을지서를 습격한다. 1개월 동안 방위근무를 하다가 현역으로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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